[스압] 칼럼 윌슨의 외로웠던 싸움 - 팟캐스트 인터뷰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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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윌슨이 뉴캐슬에서의 5년간의 여정을 마치고 팀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참에 2025년 5월 26일에 업로드된 인터뷰를 챗지피티의 번역에 힘입어 공유해 봅니다.
한 시간짜리 인터뷰의 거의 전문을 번역한 것이라 매우 길지만, 윌슨이 처음 털어놓는 숨겨진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깊은 울림이 담긴 한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맨 아래에 지피티가 해 둔 요약이 있으니 바쁘신 분들은 그것만 보세요 ㅎㅎ
Newcastle's Callum Wilson Opens Up on Eddie Howe's Influence & the Silent Battle He Fought Alone
High Performance(이하 H): 캘럼, 하이 퍼포먼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Callum Wilson(이하 W): 안녕하세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H: 코번트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셨는데, 그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 수 있을까요?
“코번트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라고 하면, 어떤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W: 철창 같은 놀이터가 떠올라요. 차고 앞 자갈밭에서 페인트로 그린 골대 앞에서 축구하던 시절이죠. 그곳이 바로 제가 축구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된 곳이에요.
저보다 훨씬 나이 많은 삼촌들과 ‘원 바운스’ 게임을 자주 했어요. 저희 가족이 워낙 대가족이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잔디 밭에서 진짜 골대를 세워주는 동네 어른이 있었어요. 어느 날 그분이 그러더라고요.
“이제 네 또래 애들이랑 뛰어야 해.”
그래서 유소년 팀에 들어가게 되었죠.
그렇게 지역 유소년 축구가 제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H: 행복한 어린 시절이었나요?
W: 아뇨, 그렇진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의 저를 만든 건 바로 그 시절이죠.
형제자매가 여섯이고, 어머니는 싱글맘이셨어요. 그리고 형제마다 아버지가 다 달랐어요.
임시보호소에 맡겨진 적도 있었고, 피난처 같은 집을 전전하기도 했어요. 푸드뱅크나 교회에서 음식을 받기도 했고요. 가정 내 폭력도 있었고, 정말 다양한 일들이 많았죠.
H: 그런 충격적인 경험들에 어떻게 대처하셨나요?
W: 밤마다 울면서 잠들었어요.
12살, 13살쯤이었나… 사실 이건 거의 아무에게도 얘기한 적 없어요.
말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아내가 그러더라고요.
“그냥 솔직하게, 당신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줘.”
자살을 생각했던 순간들이 있었어요.
기찻길을 따라 걸으며, 뛰어들 용기를 모으고 있었죠…
침대 난간에 줄을 묶어보기도 했고, 플레이스테이션 리모컨 줄에 내 몸무게를 견딜 수 있는지 시험해봤어요.
결국 매일 밤 울면서 잠들 때, 속으로는 신께 기도했어요.
“제발 이 환경에서 나를 꺼내 주세요…”
“저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어요.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요. 이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이건… 어머니도 모르세요.
그때 그건 정말 큰 트라우마였다는 걸,
지금은 아버지가 된 제가, 치료를 받으면서 깨달아가고 있어요.
H: 그런 자살 충동에서 멈추게 한 건 무엇이었나요?
W: 인생에는 내가 줄 수 있는 게 더 많다고 생각했어요.
‘인생이 고작 이게 전부일 리는 없어’ 라는 생각이 들었죠.
어떤 더 높은 힘이 저를 부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축구는 정말로 저의 구원이었어요.
엄마는 운전을 못 하셨기 때문에, 일요일 리그 코치가 집 앞에서 저를 데려다주고 데려왔어요.
집을 떠나면, 마치 진짜 가족처럼 느껴지는 환경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팀 동료들과 코치 덕분이죠.
코치는 정말 훌륭한 분이셨어요.
좋은 가정이 있었고, 집에 데려다 주는 길에 생선튀김이나 감자튀김도 사주셨어요.
제가 집에서 충분히 받지 못했던 사랑과 관심을, 그곳에서 받았던 거예요.
그게 엄마 탓도 아니었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어요.
단지 제가 자란 환경이 저를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었던 거죠.
H: 그러니까, 어머니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였고
당신은 맏이이자 아들이자, 집안의 가장이었던 거군요.
W: 네, 맞아요.
그래서 아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걸 느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동시에 너무 무력하죠.
성인 남성을 상대로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맞아요.
저희 엄마가 만났던 그 남자, 제 바로 아래 동생의 아버지가 바로 가해자였어요.
말 그대로 ‘악마’였죠.
그 일이 벌어질 당시 저는 아직 어려서…
엄마는 병원에 실려 가고, 저랑 제 동생은 임시보호소에 가게 됐어요. 그런데 따로따로요.
결국 이모가 저를 데려가서, 이모 집에서 살게 됐어요.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고 날 아껴줄 거라고 믿었던 사람들 곁에서도,
정말 진심으로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혼자 자유롭게 살던 사람 집에 얹혀 살면,
이제 누군가가 나를 책임져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싫었던 거죠.
그래서 저는 아무한테나 떠맡겨졌어요. 아무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요.
어디를 가든 적대적인 분위기였고,
계속 이집 저집 전전해야 했어요.
그야말로 ‘혼돈’이었죠.
보호시설을 옮길 때마다 전학을 다녔어요.
아마 6~7군데 학교를 다녔던 것 같아요.
코번트리의 힐필즈라는 동네에 살다 보면,
제 동생 아버지가 또 우리를 찾아내곤 했어요.
그러면 경찰이 와서 또 다른 보호소로 우리를 옮겼죠.
마치, 제 친동생의 아버지에게서 도망치는 인생이었어요.
그 남자는 우리가 다니는 학교까지 찾아와서,
교문 앞에서 “내 아들 좀 봐야겠다”라고 얘기했어요.
저는 형이니까, 그 모든 부담을 제가 떠안았어요.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죠.
결국 그 남자가 감옥에 간 뒤,
엄마는 새로운 남자친구를 만났고, 다시 아이를 낳고 정착하려 했어요.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엄마는 남자 보는 눈이 없었어요.
이번엔 폭력은 아니었지만, 알코올 중독자였어요.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서,
비틀거리고, 고함치고,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었죠.
지금 돌아보면, 저는 항상 제 형제자매들 곁에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제 가족을 그 환경에서 완전히 떼어냈어요.
그 누구도 제가 겪었던 걸 겪게 하고 싶지 않거든요.
지켜주고 싶었어요.
H: 그런 상황들—여섯 개나 되는 학교, 위탁 가정, 끊임없는 변화…
어떻게 그 안에서 적응하는 법을 배웠나요?
W: 아마 ‘웃는 얼굴’이었을 거예요.
저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캘럼은 항상 웃고 있어”라고 말할 거예요.
하지만 사실… 웃고 있을 때도, 행복하지 않을 때가 많아요.
그건 정말 ‘가면’이에요.
그저 웃는 얼굴을 쓰고 있는 거죠.
그냥 긍정적인 척을 했어요.
계속 이사를 다니다 보니, 진지한 우정이나 관계를 맺을 수가 없었죠.
어릴 적 친구 하나 있었어요.
그 친구 엄마도 비슷한 환경에 있었고,
저희는 보호소에서 처음 만났고, 나중엔 같은 학교에도 다녔어요.
하지만 그 친구는 환경에 휘둘렸고, 결국 잘못된 길로 갔어요.
그런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 길을 같이 걷게 돼요. 안타깝게도요.
저는 항상 부정적인 걸 긍정적인 에너지로 덮으려고 했어요.
그게 제 방식이었죠.
H: 그렇다면, 지금도 당신 안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유령들’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W: 아마 그 시절부터 쌓여온 ‘분노’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축구에서는 그 공격성이 허용되잖아요.
그래서 축구장은 제 분노를 해방할 수 있는 공간이었죠.
저는 주변에서 봐왔던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항상 조심했어요.
항상 침착하려고 애썼지만, 사실 제 성격은 조금 급한 편이에요.
도박 같은 걸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제 뇌에 ‘갑옷’을 입혔다고 느껴요.
그건 ‘그때의 나’일 뿐이고,
‘지금의 나’를 정의하진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H: 12살, 13살 시절의 그 어둡고 힘든 시기…
자살 충동을 멈추기 위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했나요?
W: 코번트리 유소년 아카데미에서 1년을 보냈어요.
일요일 리그 팀 친구의 부모님과 함께 다녔죠.
그분의 아들과 친구가 1년짜리 계약을 했고, 저도 같이 간 거예요.
그때 처음으로 ‘목적’이라는 걸 느꼈어요.
하지만 아카데미는 별로였어요.
일요일 리그에서 느꼈던 가족 같은 분위기가 없었거든요.
굉장히 경쟁 중심의 환경이었고,
그때 저는 그걸 감당할 준비가 안 돼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1년만에 나와서 다시 지역 리그 팀으로 돌아갔어요.
하지만 그 1년 동안, 축구에 모든 걸 건 아이들을 봤어요.
그들은 그 자리를 지키고 성공하기 위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보여줬죠.
그때 마음을 먹었어요.
“그래, 나 축구선수 될 거야.”
H: 최근에 치료(테라피)를 시작했다고 하셨죠.
언제 시작하신 건가요?
W: 아마 1년 전쯤이에요.
H: 그럼 그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치료도 없이 20년 넘게 안고 살아온 거네요?
W: 네.
축구도 잘 되고, 인생이 괜찮을 때는 그걸 억누를 수 있어요.
그런데 지난 1년 반 동안 계속 문제가 생겼고,
이젠 억누를 수 없을 만큼 쌓였어요.
작은 습관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죠.
예를 들어 도박 같은 것들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결국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꼈죠.
솔직히, 용기가 좀 필요했어요.
단지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도움이 되더라고요.
H: 약 1년 전,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느꼈을 때 상황을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 시기에 어떤 감정이었고, 어떤 행동이 나타났나요?
W: 당시 클럽 체육관의 고산 훈련실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었어요.
심박수를 측정하는 장치를 착용하고, 일정 수치를 넘어야 훈련실을 나갈 수 있는 시스템이에요.
제가 “심박수가 안 올라가요”라고 했더니,
트레이너는 “더 열심히 해야지. 열심히 안 해서 그래”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이 뭔가를 건드렸고,
제가 폭발했어요.
그 트레이너는 과거에 격투기 선수였을 정도로 강단 있는 사람이에요.
결국 서로 언쟁까지 벌였죠.
저는 자전거에서 내려와서 화난 채로 나왔고,
거의 울 뻔했어요. 분노 때문에요.
매니저가 “괜찮냐”고 물었지만,
저는 여전히 “괜찮아요”라며 괜찮은 척했죠.
2주쯤 지나서 물리치료사가 저를 불러서 말하더라고요.
“너 요즘 네 모습이 아니야.”
전 바로 방어적으로 반응했어요.
“전 진짜 괜찮아요.”
그 사람은 제 아내와도 친했기 때문에
아내에게도 “캘럼 집에서는 괜찮아요?”라고 물었어요.
아내는 “괜찮아 보여요”라고 했지만,
실은 제가 집에서는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고, 참을성도 줄어들었죠.
그러더니 그가 말하더군요.
“네가 누군가를 만나봐야 할 것 같아.”
전 “아뇨, 전 그런 사람 안 필요해요”라고 계속 부정했어요.
그런데 그가 계속 “그녀한테 연락했어?”라고 물었고, 결국 연락을 했죠.
제가 모든 걸 털어놓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말했어요.
“정말 믿기지 않아요. 이 모든 걸 혼자 감당하고 여기까지 오셨다니요.”
공식적으로 말 못 할 일들도 많지만,
지금 여기서 말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아요.
그녀는 지금의 제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듣고 정말 놀라워했죠.
H: 당신이 ‘다른 삶’을 선택했다는 점이 인상 깊어요.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길을 걷기로 마음먹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W: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구체적인 사건이 있어요.
당시 저는 15살이었고, 코번트리 U-16 팀에서 장학금을 따기 위해 뛰고 있었어요.
금요일 밤이었고, 다음 날 경기가 있었어요.
근데 저는 나이 많은 형들이랑 나가서 술을 마시고 있었죠.
그 중 한 명은 저보다 네 살 많은 친구였는데,
원래 농구를 정말 잘했어요. 그런데 마리화나를 시작하면서 모든 걸 망쳤죠.
그 친구가 골목길에서 제 손에 있던 술을 확 빼앗았어요.
그가 말했죠.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내일 경기잖아.
너는 재능이 있어. 나처럼 커리어를 망치지 마.”
처음엔 반항했어요.
하지만 결국 그의 말을 듣고 집에 돌아갔죠.
다음 날, U-16 경기에서 골을 넣었고,
바로 U-18 팀으로 불려가서 또 골을 넣었어요.
그런데 월요일에 금요일 밤에 외출했던 사실이 들통났고,
감독은 우리를 1주일 정지시키고 주급도 깎았어요.
그 감독이 제게 말했죠.
“너처럼 성공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어울려라.”
그때는 “이 사람이 뭘 안다고 그래”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충고에 정말 감사해요.
그 후로는 유소년 팀 선수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어요.
그들은 “내일 경기야”라며 항상 절제했고,
저도 그렇게 바뀌었죠.
전 아버지가 없었기에, 본받을 롤모델이 없었어요.
모든 걸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했죠.
엄마는 너무 바쁘셨어요.
제가 금요일 밤 늦게 들어와도, 그걸 간섭할 여유가 없으셨죠.
H: 그렇게 떠난 친구들은 당신의 변화에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W:그들은 금방 저를 잊었어요.
워낙 사람이 많아서, 제가 빠졌다고 티도 안 났죠.
저는 그 무리 중에서도 어린 축에 속했기 때문에
그냥 자연스럽게 빠져나왔어요.
H: 최근 몇 시즌 동안 무릎 십자인대 부상을 두 번이나 당하셨죠.
그 어린 시절의 고난이, 그런 육체적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회복력을 준 걸까요?
W: 네. 그게 핵심이었어요.
제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그 시절이 저를 단단하게 만들었죠.
자말 라셀스나 스벤 보트만 같은 팀 동료들이 제게 물어요.
“어떻게 ACL을 두 번이나 다치고도 이 레벨에서 뛸 수 있냐”고요.
하지만 제가 겪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 비하면,
이런 부상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진짜로, 그 고통에 비하면 이건 별일 아니에요.
제 정신은 항상 이렇게 말하죠.
“코번트리(과거의 삶)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해.”
말하자면, 그 시절로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면, 그 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잖아요.
그 생각이 저를 다시 일어서게 만든 거예요.
H: 두 번째 ACL 부상 후, 사람들은 당신을 포기하기 시작했죠…
“하나도 회복하기 힘든데 두 개나? 저 선수 이제 예전 같지 않겠네.”
W: 그 의심이요.
그걸 깰 수 있다는 가능성.
그게 제 새로운 동력이 되었어요.
초기엔 돈이 동기였어요.
그 환경에서 탈출하려면 돈이 필요했죠.
하지만 돈만으로는 오래 못 가요.
이젠 증명하는 게 중요해요.
누구보다 앞서 나가고, 도전하고, 경쟁하는 거죠.
에디 하우 감독에게도 말했어요.
“전 아직도 지난 시즌 첫 경기 벤치에 앉힌 걸 기억해요.” (웃음)
그 사소한 ‘앙금’이 저를 자극하고, 날카롭게 유지시켜줘요.
그 말 있잖아요.
“우리를 정의하는 건 넘어지는 방식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는 방식이다.”
그 말을 삶의 철칙으로 삼고 있어요.
제 핸드폰 배경화면에도 적혀 있어요.
부상 중일 땐, 금요일마다 1군 선수들 안 보이게 제 일정을 조절해요.
제가 다운된 상태일 때, 다른 선수들의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요.
그래도 항상 웃으며 클럽에 가요.
부상 중에도요.
H: 아까 위탁가정과 여러 학교를 전전했다고 했죠.
당시 마음은 무너져도, 늘 웃고 있었다고요.
그 웃는 얼굴, 부상 중에도 여전했나요?
W: 힘든 순간이 오면, 오히려 더 많이 웃었어요.
전 팀을 정말 사랑하거든요.
그 팀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요.
그래서 제 우울함으로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내리고 싶지 않았어요.
다른 부상 선수들을 따로 불러서 격려했죠.
사실은 제가 더 위로받고 싶었는데도요.
사람들은 “캘럼은 괜찮아. 항상 웃잖아”라고 생각해요.
H: 그럼, 진짜 감정은 누구에게 털어놓았나요?
W: …아무에게도요.
아내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어요.
그녀는 아이들 때문에도 너무 바쁘니까요.
감독에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직장과 감정을 섞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정신적으로 약하다고 보이면,
팀 선발에도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요.
‘혼자 있기’가 저만의 대처법이었어요.
제가 본머스에 있을 때 제트스키를 탔어요.
사람들은 “축구선수 장난감”이라고 했지만,
저한테는 ‘치유’였어요.
물 위에 있을 때는, 아무도 저를 건드릴 수 없었어요.
그 순간만큼은 정말 자유로웠어요.
자전거도 마찬가지예요.
그래블 바이크 타고 몇 시간씩 혼자 달렸죠.
H: 처음에는 “난 치료 필요 없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결국 어떻게 연락하게 되신 거예요?
W: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 괜찮아?”라고 묻더라고요.
그때 처음으로 저 자신에게 물었어요.
“진짜 괜찮은가?”
작은 이상 신호들이 보였어요.
도박을 더 자주 하고, 짜증을 더 내고, 인내심이 줄었어요.
경기를 못 뛰니까, 평소처럼 스트레스를 풀 수 없었고…
결국 가장 아끼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어요.
“누군가와 이야기해 봐야겠어. 단 한 번이라도.”
드디어 입을 열었을 때, 치료사가 그러더군요.
“이렇게까지 오면서 한 번도 상담을 안 받았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H: 이제 당신도 아버지잖아요.
자녀 양육에 있어서, 본인이 받지 못했던 것들이 얼마나 영향을 미치나요?
W: 거의 99.9%요.
전 아버지가 없었어요.
그래서 거꾸로 생각해봐요.
“내가 원했을 아버지는 어떤 모습일까?”
그래서 아이들에게 그런 걸 줘요.
사랑, 규칙, 안정감.
일상적인 루틴을 지켜요.
직접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리러 가고,
도덕, 윤리, 자존감에 대해 자주 이야기해요.
제 아들은 매일 자기 확언을 해요.
“나는 친절해. 나는 사랑받아. 나는 강해. 나는 윌슨이야.”
H: 그건 정말 세대를 이어온 악순환을 끊어내는 대단한 전환이네요.
W: 맞아요. 전 그 사슬을 끊었어요.
제 아버지는 제 곁에 없었지만,
저는 제 아이들 곁을 한순간도 떠나지 않아요.
남녀 간의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를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내와 함께 매일 아이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H: 팀에서도 그런 역할을 하고 계시겠네요?
W: 네. 후배 선수들에게는 멘토 같은 존재예요.
많은 후배들이 인생 얘기를 하러 와요.
돈 관리부터 감독과의 소통까지 별 얘기를 다 물어보죠.
전 이렇게 말하죠.
“나도 그거 겪었어. 난 이렇게 했어.”
그 시절 제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실수를 덜 했을지도 몰라요.
H: 지금 생각하는 리더십이란 무엇인가요?
W: 리더십이란 ‘약함을 드러낼 줄 아는 것’이에요.
자신도 인간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죠.
항상 강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진짜’여야 해요.
진짜는 진짜를 알아보죠.
사람들은 권위보다 진정성을 따르거든요.
H: 지금 인생을 돌아볼 때 어떤 감정이 드나요?
W: 인생 복권에 당첨된 기분이에요.
돈 얘기가 아니에요.
제가 출발한 곳을 생각해보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에요.
그래서 이 삶의 어느 한순간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아요.
매일 아침 일어나면서 생각하죠.
“이런 삶은 원래 내 것이 아니었어.”
H: 지금까지 인생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뭔가요?
W: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는 거예요.
세상을 속일 수는 있어요.
하지만 거울 속의 자신은 속일 수 없어요.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져야,
진짜 변화가 일어납니다.
H: 지금 당신이 겪었던 그 시절을 살아가고 있는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W: 전 이렇게 말할 거예요.
“너는 네 환경이 아니다.” (“You are not your circumstances.”)
“네가 어디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어디로 가는가야.”
“너는 너의 이야기를 바꿀 수 있어.
악순환을 끊을 수 있어.”
“그리고 그걸 해냈다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도울 수 있어야 해.”
H: 캘럼, 진솔한 이야기 정말 감사합니다.
W: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사람들이 솔직해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다음은 챗지피티의 요약입니다. 위 번역에 없는 내용도 있네요.
🔹 성장 배경과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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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코번트리에서 성장,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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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형제 중 장남,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며 다른 형제들과 아버지가 모두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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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가정폭력, 가난, 임시보호시설(세이프 하우스), 푸드뱅크 이용 등 심각한 문제들을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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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세 무렵 자살 충동까지 느낄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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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가 유일한 탈출구이자 희망이었고, 결국 이를 통해 삶의 방향을 찾음
🔹 정신 건강과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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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자신의 상처를 숨기고 살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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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을 가식적으로 지으며 감정을 억눌러 살아온 것이 “슈퍼파워”라고 착각했으나, 사실은 회피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최근 치료를 통해 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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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심리 치료(therapy)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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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자전거, 제트스키 등 물리적 활동을 통해 고립된 시간을 치유의 시간으로 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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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자녀에게 자신이 받지 못했던 사랑, 안정, 도덕적 가치를 물려주기 위해 노력 중
🔹 축구 커리어의 전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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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친구의 조언으로 술과 방황을 멈추고 축구에 집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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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커리어 초반 ACL(무릎 십자인대) 부상 두 번을 겪으며 좌절을 겪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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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철저한 루틴(동기 부여 영상, 자기성찰 등)**으로 자신을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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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 과정에서조차 딸의 출산 장면을 놓칠 정도로 축구에 헌신
🔹 아버지로서, 동료로서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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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아버지가 없었던 것을 되새기며 **“내가 되고 싶은 아버지상”**을 목표로 삶을 살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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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동료들에게도 멘토 역할을 하며 자신이 배운 삶의 교훈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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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에디 하우(Eddie Howe) 와는 매우 끈끈한 관계로, 아버지 같은 존재라 표현
🔹 핵심 메시지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인생 복권에 당첨된 것이다.”
“자신을 속이지 마라. 항상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
✅ 요약 마무리:
칼럼 윌슨은 가난과 가정폭력, 보호시설, 자살 충동, 부상 등 수많은 역경을 겪었지만, 자기 성찰과 회복 탄력성, 그리고 가족과 팀을 향한 사랑으로 그것을 극복했습니다.
이 인터뷰는 단순한 운동선수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상처 입은 한 아이가 어떻게 진정한 리더이자 부모, 그리고 멘토로 성장했는가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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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BetHesTorm님의 댓글
BetHesTorm 작성일CW9 감사했습니다 ㅠㅠ

pito님의 댓글
pito 작성일칼럼 윌슨의 몰랐던 이야기네요. 감동이 있습니다

머쪽이님의 댓글
머쪽이 작성일
슬픈 사연이네요.
다른 팀 가서도 잘 뛰었으면 좋겠습니다.

CastleBuilder님의 댓글
CastleBuilder 작성일깊은 감동을 주는 인터뷰네요. 어린 시절 힘든 일을 겪고 커가면서 최고의 리그에서 주전으로 뛰기까지. 최근까지 그런 고통을 겪다가 행복을 찾아 가는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좋은 인터뷰 번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깜달프님의 댓글
깜달프 작성일와.. 때로는 가볍고 약간의 악동같은 이미지도 있어서 이런 스토리가 있는 선수일 줄은 전혀 몰랐네요.. 큰 울림이 있는 인터뷰였습니다. 하우가 고참 선수들을 쉽게 놓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네요 ㅎ

쿠로사와루비님의 댓글
쿠로사와루비 작성일팟캐스트에서 뭔가 가벼워보이게 말하고다니고, 인스타에서 의미심장한척(?) 음유시인놀이 하고 다닌게 내막이 이런걸 알고나니 좀 많이 짠하네요..... 그러면서 삶이라는 여행의 아름다움 깨닫고 행복 전하는 사람 되고자 한다는건 보통 의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부디 어딜 가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1997년부터뉴캐슬팬인아재님의 댓글
1997년부터뉴캐슬팬인아재 작성일정말 좋아하던 선수였습니다. 뉴캐슬 개판일 때 하드 캐리하던 그 모습은 절대 안 잊힐 거예요.

그거슨진ㄹ1님의 댓글
그거슨진ㄹ1 작성일
길다고 생각도 못하고 쭉 읽었네요.
파피스 시세 이후 골 넣을 줄 아는 공격수 였습니다.
어디서든 잘 되길

Toonarmy99님의 댓글
Toonarmy99 작성일
팀이 힘들 때 고생이 많았습니다.
앞으로도 건승하길 기원합니다.

KDyer님의 댓글
KDyer 작성일항상 웃는얼굴이던 그의 배경에 이런 슬픈 과거가 있었군요.. 앞으로의 인생에는 더 행복한 시기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모카라떼님의 댓글
모카라떼 작성일
예전 리온 베스트 선수도 아주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다고 하던데 윌슨도 험난한 초년기였군요 ㅠ
커리어의 마무리가 잘 되길 바랍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막시맹의드리블님의 댓글
막시맹의드리블 작성일아 이형... 왜이리 힘들었어 다음 사즌부터 못 보니까 갑자기 확 마음이 아프네 꼭 다시 돌아와서 에디하우 옆에서 코치해주세요 저희는 항상 열려있습니다!